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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11-26 12:43
경북매일신문) 향토사학자 황인
 글쓴이 : 가운 김학동 (58.♡.249.30)
조회 : 8,570  

바다가 좋아 포항을 찾아 국사교사로 살며 향토연구에 전념하고 있는 향토사학자 황인씨는 분명 이 지역의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문화인’이다.

향토사학자 황인
2008-11-21옛 선조들의 숨결과 친구삼은 "德不孤"<덕불고:덕을 베풀면 외롭지 않다>의 세월을 살다
1987년 고인돌 조사 결심후 교사서 향토사학자로 변신
선사·불교문화, 성터 등 지역문화재 조사에 앞장서 와
“이규준 선생 업적 조명으로 관광타운 조성 이뤄지길”

30여 년 전인 1977년, 포항 동해중학교에 부임한 한 교사가 있었다. 국사 교사로 까까머리 남학생들에게 1909년 10월26일 일어났던 그 유명한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흑판에 빨간 줄로 그으며 일본의 국권침탈에 대해 가르치던 청년. 역사의식을 고취시키던 그 교사는 87년 고인돌 조사를 하겠노라고 덥석 결심했다. 역사의 진위를 가르치는데 심취해 있던 교사에서 향토사가로의 일대 변신이었다. 그리고 지금껏 옛 선조들의 숨결과 친구삼아 보내는 것이 21년째 변함없는 일상이 됐다.
지난 8월31일 동해중학교를 명예퇴임해 국사 교사라는 명함은 사라졌다는 향토사학자 황인(59·사진)씨. 포항시 남구 동해면 인근 문화유적지가 있는 곳에 가면 그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경남 고성군 동해면 양촌리가 고향인 그는 영남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첫 부임지가 포항시 남구 동해면에 위치한 동해중학교였다.
“학교 부임이래 국사과 교사로서 스카우트 지도자(훈련부교수), 학생 상담교사로서 올바른 학생상 정립을 위해 노력했어요. 특히 스카우트 지도자로서 매년 6월6일 현충일날 스카우트학생들을 인솔해 포항시 남구 장기면 죽정리의 장헌문 의병대장 묘소및 죽장면 합덕리에 있는 산남의진의 임창규 의병의 묘소를 참배해 학생들에게 애향심을 심어주었지요.”
학생들과 함께 지역 유적을 찾다보니 눈에 들어오는 유적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래서 87년 10월엔 포항 지역 고인돌 조사를 하기로 나섰다.
“처음 고인돌을 조사하러 다닐 때는 약 500여기에 달했으나 몇 년 전에 조사해 본 바로는 230여기에 불과할 정도로 많이 훼손되고 없어졌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이라도 재 조사를 해 보존하고 관리돼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좋아서 하는 일이었지만 향토사 연구가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향토사 발굴이 괜찮았죠. 동대해문화연구소 같은 연구단체가 있어 동료들이 함께 연구하고 토론할 수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몇 년 전부터는 이 연구소가 유명무실해지면서 그야말로 향토사 연구는 옛 이야기가 됐죠. 지금은 지역에 10명도 채 안 되는 향토사가들만 남았을 뿐이죠.”
그는 그동안 지역의 선사문화 및 불교문화, 성터, 봉화대 등의 자료를 조사 발견해 언론을 통해 소개해왔다. 이를 통해 지역민들이 지역에 대한 애향심을 갖게 하고 아울러 지역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높이게 한 주인공이다. 95년에는 ‘울목김부찰노연영세불망비’라는 비석을 발견해 포항지역의 목장성이 울산 목장성에 소속된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해 알렸다. 또한 비석 보호를 위해 비각 건립을 포항시에 요청해 비각이 건립되기도 했다. 장기면 방산2리 묘봉산 자락에 남파대사 비각을 세웠으며, 동해면 흥환리에는 흥인군과 감목관비석의 비각을 세우기도 했다.
경북매일신문의 ‘포항의 역사이야기’를 비롯 포항MBC ‘주간 영일만’에서 ‘고인돌 사랑’을 테마로 1년간 방송을 했는가 하면 ‘사람과 세상’, ‘라디오 열린세상’등을 통해서는 향토유적과 문화를 소개했다. 또한 TBC ‘산찾아 물따라’, KCB 다큐멘터리 ‘영일만의 큰돌 문화’, ‘테마기행-우리동네 이야기’, HCN ‘뉴스인 뉴스’ ‘영일만의 삼천년 문화유산’등 20여회의 일간지 칼럼과 방송에서 소개됐다.
그는 유달리 남파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남기고 싶다고 했다.
“남파대사는 조선시대를 이끌어 온 큰 스님으로서 불교계에 큰 흔적을 남겼어요. 특히 비석의 내용 중 임금님의 집무실에서 돌아가셨다는 글귀는 무슨 이유인지 밝혀내야 할 역사가들의 소임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이 지역에서 이렇게 크신 스님이 나셨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지요. 이 비석의 내용을 짓고 쓰신 계오 스님 또한 조선시대에 학문과 서예에 일가를 이룬 큰 스님으로서 전국에서 이 분의 글씨를 연구하는 많은 금석학 및 서체 연구가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볼 때 이 비석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고 볼 수 있지요.”
오랜 기간 지역 역사와 유적 알리기에 한시도 쉼 없이 달려가 조사하고 연구했던 그였지만 돌아보면 아쉬움이 적지 않다. 향토사학자들의 노력에 비하면 지역민들의 애착이나 관심은 이에 못 미친다고 했다.
“지역민들이 우리 문화에 대한 애착이 희박합니다. 특히 내고장에 있는 것에 대한 애정이 덜한 것 같습니다. 타 지역에 있는 것에 대하여는 굉장한 걸로 생각하면서 말이지요. 학생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올해 1학기 때 3학년학생들을 데리고 체험학습의 일환으로 장기 일원에 문화유적 답사를 갔어요. 장기읍성을 처음 본 학생이 3분의 2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다시 생각해봐야 겠지요. 그냥 놀이기구나 타고 하루 놀다 오는 것으로 보내는 체험학습보다 내고장의 문화유적 답사로 보람있는 하루를 보내는 것이 더 의미있지 않을까요?”
더러는 문화재, 유적 등을 따분한 것으로 여기는 학생들이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이 없을지 궁금했다.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학교 수행평가에 활용을 한다든지 체험학습을 향토유적지로 답사를 한다든지 사전 준비가 철저해야겠지요. 국보 1호가 불탔을 때 관심은 전 국민이 가졌는데 좀 더 교육 현장에서 토론을 시킨다든지, 문화재 보호 방법을 위한 교육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는 학생들과의 여러 현장답사 시간을 통해 많은 것을 느꼈다고 했다. 지역민들이 지역 문화재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는 것 못지않게 지역에서 우리문화재를 가꾸고 보존할 수 있는 체계적인 프로그램이 개설돼 있지 않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까웠다고. 그나마 최근에는 향토사학자나 문화재지킴이들을 강사로 초청해 문화원 등에서 문화재에 관한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생겨서 다행이라고 했다.
“늦었지만 지금 부터라도 시작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포항문화원에서 실시하고 있는 문화유산해설사 양성과정, 여성회관에서 하고 있는 지역 문화재 탐방 코스 등은 반드시 필요한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특히 포항문화원에서 실시하고 있는 ‘교직원 직무연수’는 교사들이 우리지역의 문화재를 알고 난 후 학생들에게 수업을 할 수 있도록 문화원에서 배려를 해 좋은 성과를 이루고 있는 것을 아주 만족해했다. 올해 후반기에 실시된 포항시청 직원들의 내고장의 문화유적지 탐방 같은 교육은 정말 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교육이 활성화되어 어떠한 문화유적 내지는 문화재가 있는지 알아야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훼손하기는 쉬워도 다시 복원한다는 것은 어렵잖아요.”
그가 향토사학자로 살아가는 가장 큰 기쁨은 무엇인지 넌지시 물었더니 의외의 답변이 돌아온다.
“우리집 가훈은 선친께서 써주신 ‘사필귀정’인데, 모든 일은 항상 바르게 되돌아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말은‘덕불고(德不孤·덕을 베풀면 외롭지않다)’입니다.”
바르게 살고 덕을 베푸는 것, 참되게 바른 일을 하면서 남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는 삶, 그것이 바로 향토사학자에게 요구되는 삶의 자세가 아닐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아직까지 발표되지 않은 문화유적 내지는 자료들이 조사, 발굴 되어야겠습니다. 고려시대 흥해가 배천희 진각국사가 출생지라 하여 왕명에 의하여 현에서 군으로 승격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으니 널리 홍보가 되어야겠습니다.”
“사람은 날 때와 들 때를 알아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언제나 학생들의 눈높이를 잘 맞추어야 하는데”라며 명예퇴임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그의 앞으로의 희망은 “그냥 이 지역에 대한 향토 조사를 하고 내가 좋아서 찿아온 바닷가에서 조용히 지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요즘 인생의 세 번째 꿈을 꾸고 있다. 바로 조선후기 유학자이자 천문학자, 한의학자 였던 석곡 이규준 선생의 업적이 조명되어 관광타운으로 조성되는 것이다.
“우리 지역에 이렇게 큰 학자가 있었으나 대외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다가 석곡 선생의 제자들의 모임인 소문학회에 의하여 알려져 문화재로 지정공고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특히 소문학회 제자들이 19년 동안 스승의 묘소를 참배했다는 게 요즘 보기드문 사례지요. 이것을 계기로 무너져 가는 학교상을 재정립하는 본보기로 삼았으면 합니다.”
제자가 스승을 고발하고 구타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있는 시대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는 그는 올바른 학교상이 정립되기를 바란다. 그런 도덕성을 회복해 우리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가슴 속에 하나씩의 등불로 키워갔으면 하는 소망을 내보였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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